특강 '한민족사 정론'

by caurian posted Mar 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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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사 정론

 

 

지난 2월 용무포럼에서는‘한민족사 정론’이란 주제로 만몽 김산호 선생의 특강이 있었다. 100분 동안에 다 말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저서와 자료를 참고하고 살을 덧붙여 정리한다.

만몽의 삶은 크게 3가지다. 라이파이 만화가, 사이판과 제주도에 해저관광 잠수정으로 사업을 벌인 산호그룹 CEO, 그리고 역사가이다.

역사가로서의 만몽은 만주와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고대사 유적을 철저히 탐색하고, 한민족 역사 복원서인 대쥬신제국사, 한국 105대 천황존영집. 왜사, 치우천황전, 단군조선, 조선해군과 대제독 이순신, 부여사, 부여백제사 등을 회화극본 형식으로 쓰고 그렸으며, 국가로부터 신한국인으로 선정됐고,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한 바 있다.

이즈음 만몽은 30여 년의 역사 연구를 통해서 집대성한 1600쪽에 이르는‘대한민족통사’의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1만년 역사를 역사 회화 2000여 점과 함께 기술했다. 한민족을 중심에 두고 편찬한 민족정통사서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쉬운 해설을 곁들였으며, 딱딱한 내용은 Faction(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화 해 읽기 쉽게 풀었다.

고대사와 관련해 기존 사학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의 역사를 국사가 아닌 한민족 구성원의 입장에서 서술해야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東)

 

 

 

 

사대주의 사관, 식민사학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난 수 백 년을 지배했던 사대주의와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 스스로를 낮추어 보는 자괴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기술되어 왔다.

이로써 우리는 교육과 경험을 통해 형성해 가는 가치관과 정체성에서, 역사교육을 통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긍심 정의구현 희생봉사 애국애족 등의 기본정신은 물론 패기와 높은 기상 민족의 영웅을 높이 사고 존경하는 풍토 등 긍정적인 요소는 부족하고, 몰염치 보신주의 사회정의의 외면 등 부정적인 요소가 키워진 왜곡된 교육을 받아왔다.

이런 부작용을 낳은 첫 번째는 조선시대를 지배한 사대주의 사관이었으며, 이를 고착화 한 것은 일제 식민 기간 중, 지배의 합리화를 위해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 역사의 축소작업과 이에 부역한 자들의 광복 후 역사학계 장악이었다.

일제기간 중 식민사학에 반발하여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선생 등을 통해 정립된 민족사학은 정인보 장도빈 문일평 안재홍 황의돈 등으로 이어지며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버티며 꽃을 피워왔다. 그러나 식민사학의 잔재가 주류 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민족사학자들은 재야사학이라는 꼬리표를 마치 주홍글씨처럼 달고 활동해야만 했다.

그러나 근래 발달된 경제와 기술 등으로 그간 땅속에만 묻혀 있던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유전자 분석 등의 기법이 인류의 발생과 역사의 검증에도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그간 민족사학이라 칭하던 역사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반대로 바로 이런 점이 중국과 일본 등의 역사 왜곡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어 한중일 3국은 지금 치열한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고대사를 바라보는 민족사학과 기존사학의 주장

 

우리 고대사를 바라보는 민족사학과 기존사학의 주장은 서로 다르다.

민족사학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유목민족 집단이 동진하여 배달국을 열고, 토착세력인 고인돌 집단과 결합하여 세력을 이루다, 은(殷)을 비롯한 동이족 국가를 여럿 이루었으며, 또한 정통의 단군조선을 개국했는데, 삼조선(三朝鮮 다르게는 三韓)으로 나뉘어 통치되던 단군조선이 차례로 멸망하면서, 대부여로 또 북부여 및 후기 삼한으로 이어졌다. 북부여의 쇠락과 함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기원 전후 건국되고, 고구려와 백제는 서기 4~5세기경 중국대륙의 동부와 북부에 진출해(송서, 양서, 통전, 진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북제서, 남제서 등) 세력을 떨쳤으며, 백제와 가야, 신라는 왜(倭)에도 활발히 진출하였다.”는 주장이다.

 

기존사학은“단군조선은 신화적이며 검증이 안 되어 역사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인데, 은(殷)나라에서 온 기자의 기자조선(기원전 10세기)이 우리 최초의 국가(식민지로 시작)로, 기자조선은 한(漢)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에게 멸망하고 위만조선이 건국(다시 식민지로 이어짐)된다. 이후 위만조선은 한나라에게 멸망하고,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 등에 4군을 설치해 식민지배 했다(한나라에 편입되어 나라가 없음). 우리나라 정통의 국가로 성립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낙랑의 영향으로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다가, 낙랑 멸망 후인 4세기부터 나라의 기틀을 갖추었다(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기술된 삼국의 건국 연대 부정, 이전의 200~300여 년 간의 왕조 기록은 과장된 것으로 주장)는 주장이다.”

 

김산호 선생은 기존사학의 논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국사가 아닌 민족사가 필요한 이유

 

역사학은 사실을 찾아내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진리를 찾는 작업이다. 그런데 역사가 진실게임처럼 단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환경, 상황이 변하면 진리의 정의도 바뀌듯이 역사의 실체도 역사적 사건이 있게 된 배경, 상황, 또 내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 각각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서울시내에 살고 있어도 문화적 취향이 민족의 울타리를 한참 벗어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한국에서 이미 사라진 옛 풍습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조선족 마을이 만주에 있다.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미국의 이익을 앞세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외국 국적을 가지고도 한민족의 장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국사보다 민족사가 필요한 이유가 된다. 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민족으로 꼽히는 유태인들은 국사인 이스라엘 역사를 버리고 절대적 민족사인 유태인의 역사를 중요하게 가르쳐 민족의 정체성을 강건하게 지켜간다.

국가 정체성이 민족 정체성을 흐트러뜨리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국가를 뛰어넘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오늘의 민족주의(韓民族史, The root of Hahn racial homogeneity)가 필요하다. 역사에서도 ‘국사’보다 ‘민족사’를 앞세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국수주의의 뿌리는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에 있다. 민족정체성은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특성으로 충족되지만 국가 정체성에는 다른 민족국가에 대한 양적우위를 필요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사관으로 보면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를 벗어나 한민족이 살고 있는 중앙Asia로 확장된다.

 

 

한민족사는 한민족 구성원의 역사

 

한민족사는 바로 한민족의 입장에서, 한민족을 중심에 두고 , 대한민국이라는 현대 국가의 역사가 아닌 한민족이라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동북아의 역사를 재조명한 결과를 말한다.

이렇게 바라본 역사를 통해서만 고구려와 발해가 우리 역사가 되고,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 중?일 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대응할 수 있다.

또한 한민족사를 통해 바라본 우리 역사의 흐름으로만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으며, 재중교포, 재러교포, 재일교포 등 세계 각국의 교포들을 한민족의 일원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근래 다문화라 일컬어지는 귀화 외국인 및 2세 자녀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보다 발전적이고 긍정적으로 정의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외에도 저 멀리 바이칼 호수나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 터키나 인도 또는 중앙아시아의 어느 박물관에서 발견되는 우리와 같은 언어, 풍습, 유물, 설화 등에 대해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하여 기존의 사학이 갖는 대부분의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다.

한민족사가 바라보는 역사의 관점은 마치 유태인이 바라보는 역사의 관점과도 같다. 즉 유태인이‘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삶지 않고, 구약성서를 기준으로 고대사를 그리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역사 속에서 활약했던 유태민족을 모두 아울러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한민족사란 어느 특정 국가가 아닌 '한민족' 구성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정리 : 김재동

 

 

* 이 글은 본회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